*이 글에는 영화 ‘베일리 어게인’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반려견 콩이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물론 늘 내가 말을 걸고, 콩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 거리거나 얼굴을 핥아주는 게 끝이지만… 개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반려견과 대화를 하다보면 혼잣말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이내 ‘개도 사람처럼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한다.

영화관에 갔다. 넓다란 스크린에 릴레이로 이어지는 개봉 예정작들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베일리 어게인’ 예고편이 나오자 눈이 번쩍 뜨였다. 베일리라는 이름의 개가 여러 번의 환생을 거친다는 내용이란다. 개봉하면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예매를 하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개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콩이는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에 데려온 아이다. 힘든 상황은 푸들이 가진 공감능력과 잘 맞물려 성공적인 교감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몰래 연애중인 나에게 ‘너 남자친구 생겼지?’하고 묻던 엄마처럼.
콩이는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우는 건 기가 막히게 잘 알아낸다. 몰래 울고 있어도 귀신같이 알고 찾아온다. 신기한 건 내가 우는 이유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는 것이다. 슬퍼서 울 때는 어떻게든 위로해주려고 하지만, 분노의 눈물을 흘릴 때는 그냥 내버려둔다. 이럴 땐 눈물에서 상황에 따라 다른 냄새가 나나 싶다.
“웃는 개가 어딨어?”

영화 속 개들은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냄새로 알아차린다. 예를 들자면 땀냄새를 통해 이성 간의 오묘한 분위기를 눈치채는 식이다. 이외에도 개들이 눈치채는 감정들은 생각보다 아주 다양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개들이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때론 우리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차피 쟤는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몰라~’하며 반려견에게 재미로 욕을 하던 옛 지인이 생각난다. 지인이라고 부르기도 거북한 그 사람이 이 영화를 꼭 보길 간절히 바란다.
개의 행복은 주인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TV 프로그램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의 타이틀이 정말 마음에 든다. 세상에 나쁜 개가 없다는 건 결국 ‘모든 개들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말로 연결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어떤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지는 알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견생이란 편리해보이면서도 때론 가엾기 짝이 없다.
“인간은 개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곤 해. 이별 같은 일 말이야.”

전에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전단지도 붙이며 수일을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몇 날 며칠을 울며 지냈다. 왜 그때 근처 유기견 보호소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아직도 너무 후회가 된다.
아무튼, 그렇게 잃어버린지 몇 달쯤 된 어느날 꿈에 그 강아지가 나타났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관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족들이 귀가하면 항상 난리 법석을 떨던 녀석이었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인사를 하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났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꿈의 의미를 알았다. 하늘나라로 가기 전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개가 느끼는 행복감은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주인의 부주의로 실종되어 (순전히 내 예상이지만)무지개 다리를 건넌 것처럼, 영화 속 개들도 주인에 따라 무미건조한 삶을 살기도, 견맥(?)을 넓힐 기회를 상실하기도 하며 때론 유기견이 된다.
“이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내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어.”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개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개들의 목표는 ‘주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주인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반려견에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개 팔자가 상 팔자다’라고 외치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주인에 대한 개들의 사랑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크고 넓은 것일지도 모른다.
견주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영화

제작자들은 이 영화를 휴머니즘 가족영화라고 소개하지만, 내게는 ‘견주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니 반성문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내 반려견을 만나 이렇게 행복한데, 그 아이도 나 때문에 행복할까? 만약 콩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도 내 반려견으로 살고 싶을까? 내 개의 마음은 몰라도 내 마음은 확실하다. 나는 다음 생에도 콩이의 반려인으로 살고 싶다.
“내가 개로 살면서 깨달은 건 ‘즐겁게 살라’는 거야. 그저 지금을 살아. 그게 개가 사는 목적이야.”

베일리는 영화의 마지막을 ‘즐겁게 지금을 살라’는 조언으로 장식한다.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는 건 사람에겐 수만 가지의 즐거운 일들 중 하나지만, 개들에겐 인생 최고의 시간일 것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한 가지씩 해보길 바란다. 베일리가 낡고 헤진 공이라도 주인과의 공놀이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것처럼, 지금 반려견에게 필요한 건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다.